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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수빈 박씨

제 23대 순조

차남 : 순조(1790-1834)

재위기간 : 1800.7-1834.11(34년 4개월)

부인 : 2명 / 자녀 : 1남 5녀

1부인

순원왕후 김씨

1남4녀

2부인

숙의 박씨

1녀

익종(효명세자)

?(일찍죽음)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영온옹주

 

 money.gif 주요 정치사

         1. 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2. 천주교 박해를 통한 벽파의 정권 장악

         3.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

         4. [순조실록] 편찬

  money.gif 역사 개요

▣ 순조 (純祖)

  이름 공(吏).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 英祖繼妃 慶州金氏))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1802년(순조 2) 10월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王妃-純元王后)로 맞았다. 1801년 대왕대비는 궁방(宮房)과 관아(官衙)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公奴婢)를 혁파하고 서얼유통(庶孼流通)을 시행하는 한편, 정조 때부터 집권해오던 시파(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200여명의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할 때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辛酉迫害).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에는 경상·충청·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이고(乙亥迫害), 1827년에도 충청·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즉,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고 정치에 관여하게 된 국구(國舅)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어,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달순(金達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 등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여 전횡(專橫)과 뇌물을 받는 행위를 일삼으니,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1811년 한성에 도적과 거지떼가 들끓었고, 1813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梁濟海)와 1815년 용인의 이응길(李應吉)이 민란을 일으켰다. 1817년에는 유칠재(柳七在)·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凶書事件), 1819년에는 액예(掖隷)와 원예(院隷)의 작당 모반운동(謀叛運動), 1826년에는 청주에서 괘서사건(掛書事件)이 일어났으며,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재위 34년 중 1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다.한편 왕은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사부수권 四部手圈》· 《대학유의大學類義》·《서운관지 書雲觀志》 ·《정조어정홍재전서 正祖御定弘齋全書》·《동문휘고 同文彙考》 등을 간행하게 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치적이 있었다.

   능은 경기 광주의 인릉(仁陵)이다.

Data:mt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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